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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못다한 성공과 온전한 실패 (히틀러의 잔상)

"모든 것이 틀린 것이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p19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제3제국,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일군 독일의 총통 히틀러는 13년을 독일의 정상으로 군림했다. 그 끝은 모두가 알듯이 독소전쟁의 패배로 인한 권총 자살이다. 패배 원인에 대해선 다들 관점이 다르지만 대체로 히틀러의 오판을 주 이유로 든다. 구데리안의 집단군을 모스크바로 직행시키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먼저 침공한 것이나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장군들에 대한 신뢰를 잃고 직접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모든 작전에 세세히 관여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것은 전쟁에서 이긴 스탈린이 소련군 장성들의 말을 귀기울인 것과 대조한 결과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if는 없고 독일은 독소전쟁 시작부터 이미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그 돌파구가 독소전쟁이었으며 독소전쟁은 필연적이었다.

거대한 식민제국들에게 처음부터 독일은 이길 수 없었다. 물론 당신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히틀러는 실패했고 패배했다. 혁명도 아니고 쿠데타도 아니고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투표를 통해 선출되어 끝내 전제 권력을 손에 넣은 사람의 결말은 권총 자살이었다. 그는 시대의 패배자로서 승리자들에 의해 매장되었지만 그 족적은 대단해서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기존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미국 주도 하의 완전히 새로운 세계 질서가 수립되었다. 결국 결과만 놓고 보자면 히틀러는 미국 좋은 일만 했다.

중요한 건 그 족적이다. 이긴 것은 루즈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인데 세상은 그들보다 히틀러를 기억한다. 히틀러가 죽은 지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히틀러에 대한 책과 방송은 매년 새로 출판되고 편성되며 동일한 시대의 독일 역사책임에도 나치를 붙이지 않으면 판매량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인셀이나 너드의 컨셉적인 추종이나 백인 인종주의자의 숭배, 또는 심볼에 대한 추종은 아직도 존재한다.

왜? 왜 히틀러는 아직도 전세계의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걸까. 매력적이란 말에 어폐가 있겠지만 관심도라고 따져보자. 히틀러는 작금의 할리우드 스타를 넘는 인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는 어떻게 시대가 지나도 아마 백 년이 더 지나도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는 걸까. 그 매력은 어디서 올까. 고졸로 총통까지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그의 성공담? 인상 깊은 연설들? 그가 외친 이념과 사상? 그가 선구적으로 행한 정책들? 정복 전쟁과 유대인 대학살? 모두 이유가 될 것이다. 그의 발자취는 지금도 새로 분석되고 있으며 하나하나가 강렬하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관점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그가 실패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실패는 아니다. 그는 전쟁에서 실패했다. 그는 정치가로서 정치에서의 자신의 고집을 온전히 고수하지 못한 채 전쟁에서 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즉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못했다. 그의 실패는 전쟁의 패배지, 통치의 실패가 아니었다. 나치의 독일 통치의 성공과 암면에 대해 온갖 모순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고 히틀러의 정책들이 그저 땜빵 식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주장일 뿐. 히틀러의 제3제국은 세계인들에게 결국 실패를 내보여주지 않고 그와 함께 사라졌다. 2차 세계대전의 패배가 제3제국의 통치의 실패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원론이 아닌 대중론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의 인상에는 히틀러는 전쟁에서 졌지 독일 부흥에 실패하지 않았다는 인상이 있다. 또한 그 반례로 스탈린이 있다.

스탈린은 독소전쟁에 승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히틀러가 독일 장성들을 경시하고 독단한 것과 대조해서 그의 전쟁 승리의 이유를 찾고 추앙하는 사람도 폄훼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그는 이겼고 전후에 계속 소련의 통치를 이어갔다. 소련은 부강해졌고 미국과 대등하게 견주는 냉전 시대를 열었다. 그는 전쟁도 통치도 승리한 독재자인가? 그런데 스탈린을 추종하는 사람은 지금 매우 찾기 힘들다. 왜일까? 그의 통치는 결국 실패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드러난 사실과 기억되는 것은 스탈린은 인간 백정이라고 불릴 만큼 숙청에 앞장 섰다는 것이며 무려 2천3백만 명을 죽였다. 그가 지배한 소련은 결국 내부적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붕괴해버렸다. 그의 성공은 소련 인민을 탄압해 손에 넣은 빛 좋은 개살구다. 이제 소련식 공산주의를 하려는 사람은 머저리라고 놀림 받지 않는 게 다행인 수준이 되었다.

스탈린의 소련은 실패했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스탈린을 추종하는 사람은 적다. 아직도 공산주의자는 더러 있지만 스탈린의 사진을 걸어두는 공산주의자는 없다. 모든 공산독재자가 그렇듯 자신의 재임 기간을 제외하고는 숭배자를 찾기 힘들다. 히틀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독소전쟁도 이기고 소련의 성공 시절을 이끌었음에도 결국 그는 모순 덩어리 국가를 운영하며 온갖 폭압과 압제를 남발하던 독재자로 남았다. 결국 그는 실패자로 역사에 남는다. 온전한 실패다.
(이에 대한 의견이 다를 수 있으나 결국 소련식 공산주의는 실패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에 비하면 유대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러는 아직도 대중들에게 건재하다. 독소전쟁에서만 이겼으면, 소련에 쳐들어가지 않았으면, 몇 년도에 그가 멈췄으면. 물론 알면 알수록 다 반박 거리가 넘쳐나는 것들이지만 수많은 if가 그에게 붙어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온전한 실패가 없다. 오히려 못다한 성공이라 표현할 만하다.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처절한 종막이 소련에게는 나타나서 스탈린 신화가 무너지고 그의 통치는 철저히 먹칠 당했으나 히틀러는 베를린의 방공호에서 끝을 맺어 아직도 그의 가능성을 아쉬워하는 추종자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이념이든 사상이든 통치 체제든.

그것이 단순히 재미로든, 컨셉이든, 분석이 부족해서든, 진심이든. 그 때문에 다들 히틀러라면 벌떼처럼 일어나고 온갖 토론이 끊이질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추종자가 진입하고 입이 헐어버린 전문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전문가들도 다 주장이 다르다. 대중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의 못다한 성공이 사람들에게 끝나지 않을 여운을 남긴 것이다.

내 생각에 히틀러가 만약 어느 시점에 휴전이라도 해서 국가경영을 재시도하고 독일 경제를 끝내 파탄으로 몰고 갔다면 히틀러는 아직까지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탈린과 비슷하게 그저 단순한, 폭압적인 독재자로 남았을 것이고 나치는 80년이 지난 지금 금기가 아닌 그저 철지난 구태 정치 체제로 받아 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와 그의 정치는 베를린의 벙커에서 권총 자살로 끝을 맺었고 그와 나치는 아직도 가능성을 품은 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버렸다.

나치를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상 히틀러는 죽지 않은 것이다. 그는 계속 현대인의 마음 속에 자리할 것이고 그가 옳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천 마디 반박도 소용없다. 소련은 붕괴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이론 뿐인 허울이라고 대중들이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히틀러와 제3제국은 다시 출현할 수 없으니 그것이 불가능하다. 히틀러의 히틀러만 가능했던 제3제국. 결국 히틀러가 스스로 끝내지 못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통치는 그 누구도 끝낼 수 없다. 1945년의 제3제국은 패망했지만 나치와의 전쟁은 아직도 지속 중인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아이히만의 증언을 읽고 느낀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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